선 3줄 요약:
1. 가톨릭대 결정문에서 교육부의 연구부정 개념은 너무 협소했음.
2. 윤지선 박사의 논문은 함량 미달의 저질 논문
3. 철학연구회는 이런 논문 대체 왜 실었냐
-----------------------------------이하 전문------------------------------------
최성호 경희대 교수 기고
유튜버 김보겸 씨로부터 윤지선 박사의 논문에 대한 가톨릭대의 결과 통지문을 검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김보겸 씨의 부탁을 받고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나서서 의견을 표명한들 괜한 분란만 더 조장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왕 김보겸 씨의 부탁을 받은 마당에 한국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는 공동체의 한 일원인 제가 이번 사안에 대하여 마냥 침묵하는 것은 학자에게 부여된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 판단했고, 그런 판단에 따라 김보겸 씨의 부탁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런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동료 철학자들의 조언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윤지선 박사의 논문에 대한 최근 논란 전반에 대한 제 개인적인 소감을 간단히 피력하고자 합니다.
교육부 지침은 한계 있지만 공정한 평가
먼저 가톨릭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수정 전 논문의 경우 변조에 해당하는 연구부정이 있는 반면에 수정 후 논문의 경우 어떠한 연구부정도 없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김보겸 씨의 입장에서 다소간의 아쉬움이 있을 수 있겠으나 저는 가톨릭대 결정문이 연구부정에 대한 교육부의 지침이라는 한계 안에서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지닌 문제점을 비교적 공정하게 평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교육부의 지침이 ‘연구부정’ 개념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루’라는 표현의 의미는 김보겸 씨의 명예에 굉장히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윤지선 박사는 문제의 논문에서 그 의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어떠한 사실적 자료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고, 그것은 수정 후 논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연구부정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연구자로서의 윤리를 저버렸다는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유사하게 윤지선 박사가 논문에서 ‘한남1충’이나 ‘한남유충’과 같은 혐오표현들을 아무런 주의 없이 마구 사용하고 있다는 것 역시, 설사 그것이 기존의 교육부 지침에 의해 연구부정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학술 연구자로서의 윤리를 위배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 힘듭니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대의 연구진실성위원회가 이번 결정문에서 윤지선 박사의 논문, 특히 수정 후의 논문에서 연구부정이 없다고 판정했지만, 저는 그것이 윤지선 박사의 논문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교육부의 ‘연구부정’ 개념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타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킬 수 있는 주장을 펴면서 그에 합당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든지 혹은 혐오표현을 논문에서 아무런 주의 없이 마구 사용하는 것은, 설사 그것들이 현재 교육부 지침의 미비로 인하여 연구부정으로 판정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명백히 연구자로서의 윤리를 위배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윤지선 박사의 논문에 대한 가톨릭대의 결정문은 연구부정이나 연구윤리에 대한 교육부의 지침이 보완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윤지선 논문은 학술적 가치가 전무한 텍스트
가톨릭대 연구진실성위원회가 조사한 것은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연구부정을 저질렀는지, 연구윤리에 부합하는지 등입니다. 여기서 제가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연구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연구윤리에 부합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든 논문이 학술적으로 가치 있는 연구업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연구윤리의 측면에서 문제가 없는 논문들도 핵심 논제의 신빙성 결여, 적절한 논거의 부재, 논증의 부당성 등으로 인해 학술적으로 함량 미달이라는 평가를 받기 일쑤입니다. 실제로 <교수신문>에 실린 이충진 교수의 기고문이나 <한겨레신문>과 <뉴스토마토>에 실린 김우재 교수의 기고문은 이러한 논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사하게 『철학적 분석』에 실린 이준효 박사의 논문 「페미니즘과 테러리즘」 역시 윤지선 박사의 논문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저는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애초에 연구부정이나 연구윤리를 논할 가치조차 없는 함량 미달의 저질논문이라고 판단합니다. 학술적 가치가 전무한 텍스트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의 관점에서 윤지선 박사의 논문과 관련한 논란에서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은 윤지선 박사도 아니고 가톨릭대도 아닙니다.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은 그러한 윤지선 박사의 논문을 『철학 연구』라는 학술지에 게재함으로써 그 저질 텍스트에 학문의 권위를 부여한 철학연구회입니다.
우리 주위에 학문적 수준이 결여된 잡문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아무렇게나 쓰인 페이스북 게시글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 등이 그 좋은 사례들입니다. 그 글들이 나름의 가치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지식을 생산하고 축적하는 학문의 영역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윤지선 박사의 논문 역시 그러한 잡문의 하나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자기과시적이고 현학적인 표현들로 도배되어 있다 보니 학문적 글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뭔가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줄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인터넷을 떠도는 수많은 잡문과 비슷한 수준의 저질 텍스트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저질 텍스트를 썼다는 이유로 윤지선 박사를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누구나 글을 쓰다 보면 (실수로 혹은 능력의 부족으로) 잡문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지선 박사가 「‘관음충’의 발생학」이라는 엉터리 잡문을 쓴 만큼 어느 정도의 비난은 감수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윤지선 박사를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한국 철학 공동체 전체의 위상이 훼손되다
진정 과도한 비난 받아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학연구회입니다. 학문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저질 텍스트에 학문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보이루’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한 윤지선의 근거 없는 주장이, ‘한남1충’이나 ‘한남유충’과 같은 혐오표현이 학문적 활동이라는 미명 하에서 유포되고 전파되는 결과를 초래한 책임이 바로 철학연구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운전에 미숙한 아이에게 운전면허증이 발급되고 그 아이가 그렇게 발급된 운전면허증으로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면 그 사고에 대하여 누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까요? 운전에 미숙한 아이에게 전혀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큰 책임은 그러한 아이에게 면허증을 발급한 기관이 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 아이에게 자동차 운전은 사실상 사회적 흉기나 다름 없는데, 운전면허증은 그것을 합법적인 활동으로 인정해 준 꼴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윤지선의 저질 텍스트는 김보겸 씨와 같은 이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끼치고 나아가 남녀 갈등을 불필요하게 부추기며 한국 사회에 사회적 흉기와 같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철학연구회는 윤지선 박사의 저질 텍스트를 학술지 『철학 연구』를 통해 출간함으로써 그러한 사회적 흉기에 학문의 권위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마치 운전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운전면허증을 발급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윤지선 박사의 논문과 관련된 논란에서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철학연구회라고 봅니다. 그런 만큼 저는 철학연구회가 이 사안에 대해서 커다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연구회는 애초 윤지선 박사의 논문을 학술지 『철학 연구』에 게재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심사를 통하여 탈락시켜야 할 논문을 탈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윤지선 박사의 논문을 심사하던 시점을 기준으로 『철학 연구』의 투고 논문 심사 절차에는 상당한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번 사안이 불거진 이후 철학연구회가 내놓은 입장문은 현재 상황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습니다. 그 입장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윤지선 박사의 논문은 『철학 연구』의 심사 규정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3명의 익명심사를 통과한 결과 학술지에 게재되었기에 윤지선 박사의 논문 발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 연구』의 심사를 통과했다는 사실이 저질의 논문을 양질의 논문으로 둔갑시키지는 못합니다.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철학 연구』의 심사를 통과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교훈은 『철학 연구』의 심사 절차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연구회는 그런 점을 통렬히 인식하며 그에 합당한 조치(피해자들에 대한 학회차원의 사과, 윤지선 논문 출판 당시의 편집위원장 및 편집위원들의 유감 표명, 투고 논문 심사 규정을 수정·보완하겠다는 약속 등)를 취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는 철학연구회가 윤지선 박사의 논문 사태를 초래함에 있어서 가장 큰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태를 사후적으로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무능과 무책임으로 일관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황이 심각한 것은 무능과 무책임으로 일관한 철학연구회의 모습이 단지 철학연구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생물학자인 김우재 교수의 칼럼이 적절히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번 윤지선 박사의 논문 사태는 한국 철학 공동체 전체의, 아니, 한국 인문학계 전체의 위상을 심대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국 인문학계에 작은 위로를 보낸다”는 김우재 교수의 일침이 진정 뼈아프게 느껴집니다. 철학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철학연구회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하여 제가 참담함을 금치 못하는 이유입니다.
건강한 성평등과 페미니즘을 위하여
앞서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는 윤지선 박사가 함량 미달 논문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윤지선 박사를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자가 논문을 쓰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함량 미달의 논문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안이 사회적 논란으로 불거진 이후 윤지선 박사가 보여준 모습은 윤지선 박사가 과연 학자로서 최소한의 소양을 지닌 분인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특히 자신의 논문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을 학문의 자유를 짓밟는 반지성주의적 파시스트라고 낙인 찍고, 자신의 논문에 대한 찬반 양론을 남혐/여혐 구도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엉터리 저질 논문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으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반성하고 자숙하는 것이 마땅한데 윤지선 박사는 그와 정반대의 모습, 자신이 여성혐오의 희생자인 양 가장하며 남성혐오를 부추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철학연구회에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윤지선 박사가 자신을 향한 비판에 대하여 ‘학문의 자유’ 운운하며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철학연구회가 윤지선 박사의 논문을 『철학 연구』에 게재해 준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철학 연구』에서 윤지선 박사의 논문을 게재하지 않았더라면 애초 이런 논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윤지선 박사의 글이 논란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학문의 자유’ 운운하며 대응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성평등과 페미니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런 이유로 그와 관련한 강의도 여러 차례 개설한 바 있습니다. 인간들이 성별이나 인종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부당하게 차별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성별이나 인종이 정확히 무엇인지, 차별이 부당하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이해를 얻기 위한 진지한 학문적 시도로서 페미니즘 철학을 학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가 곧잘 남성혐오/여성혐오의 논쟁으로 변질되는 것을 목격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남혐을 선동하는 이들이나 여혐을 선동하는 이들 모두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서로를 혐오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협력해야 하는 동반자의 관계입니다. 물론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생물학적 차이를 포함한 다양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러한 차이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롭게 정립해야 할 난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수많은 토론과 숙의를 통해서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난제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혐오하는 문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그러한 난제의 해결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남성이나 여성에게 함부로 혐오와 배제의 언어를 남발하는 일부 극단적 세력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밝혀둡니다. 저는 2008년 철학연구회가 격년마다 수여하는 ‘철학연구회 논문상’을 수상한 것 이외에 철학연구회와 어떠한 인연도 맺지 않았습니다. 철학연구회 회원도 아니고 학술지 『철학 연구』에 논문을 발표한 적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철학연구회 회원이 될 마음이 없고 『철학 연구』를 통하여 연구 논문을 발표할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최성호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과학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 전임강사, 캐나다 퀸스대 철학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그럼 군대 다녀온 나는 비양심적이란 말이냐』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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