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문>
술이 화가 된 지는 오래이다. 그 근원은 언제부터인가? 우왕은 향기로운 술을 미워했고, 무왕은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으며, 위왕 무공은 술 때문에 저지른 허물을 후회하는 시를 지었다. 술의 폐해를 크게 염려했으면서도 모두 그 근원을 끊지 못했으니 어째서인가? 후세 임금 중에 술 때문에 망한 사람이 많은데, 하나하나 열거하여 말 할 수 있는가?
우리 조정의 여러 훌륭한 임금들도 대대로 술을 경계하였다. 세종대왕께서 글을 지어 조정과 민간에 유시하신 것은 세 성인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오늘날 아랫사람들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이 더욱 심해져 어떤 자는 술에 빠져 일을 하지 않고, 어떤 자는 술에 중독되어 덕을 무너뜨린다. 흉년을 당하여 금주령을 내려 막아도 민간에서는 끊임없이 술을 빚어 곡식이 거의 없어질 지경이다. 이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을과 장원급제 '김구'의 답안>
집사선생께서 봄날 과장科場에서 술의 화禍를 책문으로 삼으시어, 먼저 역대의 폐단을 거론하고 오늘을 언급한 다음, 구제하는 방도를 듣고자 하시니, 제가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어찌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여 기대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건데, 천하에는 생기기 쉬운 화와 구제하기 어려운 화가 있습니다. 생기기 쉬운 화는 물화物禍이고, 구제하기 어려운 화는 심화心禍입니다. 구제하기 어려운 것이 먼저 나타나고, 생기기 쉬운 것은 뒤에 나타나니, 심화는 원인이고 물화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나무가 병이 들면 좀이 슬고, 젓갈에 악취가 나면 구더기가 들으니, 술의 화가 심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술의 화는 심각합니다. 사람에게는 떳떳한 성품이 있는데 술이 그것을 해치고, 차례에는 오륜의 질서가 있는데 술이 그것을 어지럽히고, 만사는 제도가 있는데 술이 그것을 없애 버리니, 술은 성품을 베는 도끼입니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도 술을 마시면 어리석어지고, 명철한 사람도 술을 마시면 혼미해지고, 강한 사람도 술을 마시면 나약해지니, 술은 마음을 공격하는 문門입니다. 그래서 천하의 어느 누구라도 "술은 사람에게 재화을 입히니 즉시 없애야 하고, 술은 체통을 잃게 하니 즉시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술의 화가 크지만 쓰임새 또한 큽니다. 술은 제사를 지내고, 종족을 화합하는데 쓰이며, 온갖 예를 이루게 하고, 군신간에 잔치를 베푸는데 쓰이니, 어찌 없앨 수도 있으며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음양∙풍우∙회명陰陽風雨晦明은 하늘의 여섯가지 기운입니다. 사람이 기운을 과도하게 써서 병이 나면 의사가 ‘여섯 기운이 병을 낫게 하는 원인이니, 음양∙풍우∙회명을 없애야 병을 고칠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돌팔이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몸을 지키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은 몸을 지키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지, 여섯 기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수양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는 마음을 수양하지 못해서 당하는 것이지 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술만 탓하고 마음을 탓하지 않거나, 물화만 근심하고 심화를 근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성품을 잃어버리고, 몸을 망치고, 병을 불러들이고, 화를 초래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현명한 임금은 몸을 수양해 아랫사람을 이끌었고, 훌륭한 선비가 마음을 수양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하지 못한 임금과 용렬한 사람은 그러하지 못해 나라를 망치고 집안을 폐한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현문에 대하여 아뢰겠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청렴하고 담백한 풍기가 있었고, 풍속도 소박하고 백성이 순진하여 아직 제도를 만들지 않았고, 땅의 마땅함을 좇아서 물로 술을 빚었습니다. 요∙순 왕과 우왕도 제사 때 그것을 썼습니다. 그런데 의적(하나라 때 사람, 처음 술을 빚은 것으로 알려짐)이란 사람에 이르러이 향기로운 술을 빚은 뒤부터, 은∙주나라가 이를 쓰게 되었으니,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겠습니다.
맹자가 말씀하신 '맛있는 술을 미워했다.'는 말을 살펴보면, 우왕이 술의 화에 대해 얼마나 많이 염려했는지 알 수 있고, <서경> <주서周書> ‘주고酒誥’편을 보면, 무왕이 술의 화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대비했음을 알 수 있고, 또 <시경> <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이란 시를 보면, 위나라 무공이 술의 화에 대해 많이 후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술의 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복을 입고 있을 때라도, 병이 생기면 술을 마신다.'는 말이 <서경> <하서>에 있고, '주인酒人'의 관직이 <주례周禮> <주관>에 나와 있고, '저 큰 술잔에 술을 따른다.'는 구절이 '자신을 경계하는 시(自警之詩)'에 실려 있으니, 그 근원을 끊기 어려운 것은 분명합니다. 우왕이나 무왕, 위나라 무공같은 덕이 고귀한 분들이 술의 화를 깊이 후회하면서 단단히 대비하려고 했던 것이 어찌 술이 사람을 망치지 않고 나라를 해치지 않는데도 그들이 그렇게 했겠으며, 그들의 교화가 백성들을 이끌기에 부족하지 않은데도 그렇게 했겠습니까?
하지만 술은 예를 이루는 도구로서, 나이 든 어른을 높이 받들고, 손님을 대접할 때 쓰이니 감히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손님과 주인이 여러차례 절을 하고 술을 세 차례 돌린다.’ 라는 말이나, ‘하루 종일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라는 말도 있으니, 사람이 때에 맞게 술을 마시고 절도 있게 사용한다면, 성품이 포악해지거나 감정이 격해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이 술을 쓰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또 술을 금지할 수 없음도 알기에, 술잔에조차 경계는 뜻을 새겨 놓았습니다. '상觴'이라는 술잔에 술을 채우는 것은 상傷함을 경계한 것이고, '치卮'라는 둥근 그릇으로 술을 뜨는 것은 위태로움危을 경계한 것이니, 이는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술잔을 입에 댈 때, 환난을 생각해서 미리 방지할 바를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인이 심화를 먼저 금지하고 물화를 나중에 금지한 것은, 물화는 생기기도 쉽지만 구제하기도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아! 세상의 도가 쇠퇴하고 미약해지고, 인심이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폭군과 용렬한 왕들이 '마음을 수양하는 도'와 '화를 떨쳐버리는 근본'을 알지 못하여 줄줄이 패망하니, 모두 술로 인한 재앙입니다. 주지육림에 빠진 걸∙주, 술과 여색을 탐닉한 성제成帝(전한 11대 황제), 요사한 음률과 춤과 술로 방탕하게 지낸 진 후주後主(진나라 마지막 황제)를 비롯하여, 수 양제와 당 현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술을 절제 없이 마셔 똑같은 화를 당했습니다. 이런 부류는 좌계左契(둘로 나눈 한쪽의 것으로 약속의 증거)를 잡고 ‘수효를 세는 도구’로 세어도 죄책을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일이 세어 듣기를 원하시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다만 백에 하나 정도만을 거론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례를 말씀드리면, 여러 훌륭한 임금께서 대대로 요순시대와 삼대의 풍속을 되찾고자 애쓰셨고, 요순과 우∙무왕의 마음을 체득하시어 반드시 먼저 백성들의 심화를 막고 난 뒤에 술의 화를 막았습니다. 태종대왕 때 사람들이 모여서 술 마시는 것을 처음으로 금지했고, 이어서 세종대왕 때 술을 경계하는 글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하의 우왕이 향기로운 술을 미워하고, 주 무왕이 매방 사람들에게 술을 경계시키며, 위 무공이 '빈지초연'이라는 시를 지은 마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술에 빠지는 습관에서 벗어나 순박한 옛 풍속을 좇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전에는 굴대 비녀장을 빼어 우물에 던지고는 못가게 간곡히 막아 누추한 집에서나마 편히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손님을 억지로 붙잡아 둔 채 술단지가 고꾸라질 정도로 술을 마셔대는 풍조가 있습니다. 사대부들이 비록 술주정을 할 정도로 마시기는 해도, 얼굴이 벌개져서 누룩을 베거나 술지게미를 깔고 누울 정도로 진창 마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서민들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서로 사양하는 예가 질서정연한 자리에서 행해졌다거나 거동이 신중하고 온순한 빛을 띠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유달리 성상께서 다스리는 이 때에 와서 백성이 날로 술마시기를 숭상여 점점 심하게 탐닉하고 심지어는 술에 빠져 일을 돌보지 않는 자가 있고, 정신이 혼미해져 덕을 무너뜨리는 자가 있습니다. 고관대작의 집에서는 밤낮으로 비틀대며 춤을 추고, 길거리에서는 시끌벅적하게 싸우고 떠들고, 음란하고 방탕한 사람을 세상은 '달관했다.'하고, 술과 여색에 무심한 사람을 오히려 썩어빠졌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부모의 상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재계齋戒하는 중에도 여전히 술을 마셔대니, 천자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삼년상을 행하는 뜻은 어디에 있으며, 재계하고 경건하게 지녀야 할 몸가짐은 어디에 뜻이 있습니까?
술과 고기는 같은 용도의 물건인데 지금은 따로 둘 다를 얻으려고 하니, 매우 어그러진 풍속입니다. 술이 생기면 삶은 돼지와 닭국까지 구해 먹으려고 하니, 어느 누가 편안하겠습니까? 조정에서도 이렇게 하고 서울에서도 이렇게 하며 사방에서 이와같이 행하니, 이것이 무슨 풍속입니까?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고, 왜변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아비와 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고 서로 이리저리 흩어지니 집 울타리만 쓸쓸하게 남아, 닭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마저 드뭅니다. 그런데도 사대부 집안에서는 날마다 술 마시는 것을 일삼고, 화려하게 꾸민 방에 예쁜 아이와 여자를 들여 놓고, 깊숙한 당堂에 기생들을 불러 춤과 노래를 하게 합니다. 소, 양, 돼지고기는 너무 많아 냄새가 진동해 먹을 수 없고, 여러 번 빚은 진한 술은 썩어서 마실 수 없을 정도이니, 그들은 흉년으로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에는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정자程子(송대 학자)가 흰 쌀밥을 먹지 않고, 공의휴公儀休(노나라 재상)가 고기를 받지 않은 것과 어찌 이리 다릅니까?
나라에서 하루에 세 번씩이나 금주령을 내려도 어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아! 샘에서 흘러나와 범람하고 길이 열려 사방으로 통하는 법이니, 민간에서 끊임없이 술을 빚어대어 곡식이 고갈되는 것이 어찌 이상하겠습니까? 풍속이 이렇게 변하고 선비의 습관이 이렇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이 점차 경박해져 아랫사람들이 저절로 더렵혀진 것입니까, 아니면 교화가 밝지 않고, 기강이 서지 않아 이렇게 된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연산군 대의 풍습인데 아직까지 개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저는 감히 그렇지 않다고도 못하겠고 그렇다고도 못하겠습니다. 오로지 윗 사람이 마음으로 인도하지 않고 법으로만 금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진실로 마음을 바르게 하여 능히 그 폐단을 구제한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 또한 마음을 바르게 하워 능히 습관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사람들은 술이란 제사를 위해 만든 것이지 놀고 즐기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잔치 때 마시기 위한 것이지 곤드레만드레 취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각자 의지를 갖고 분수를 지키면, 술이 내 마음을 침범하지 못하여 마음에 욕망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술의 화가 내 몸을 상하게 할 수 없게 되어 수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술 대신 선을 숭상하고 의를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의를 좋아하면나라를 위하여 진력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이니, 어찌 일을 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근심하겠습니까? 또 선을 숭상하면 배우기를 힘쓰고 도를 좇느라 정신이 없을 터이니, 어찌 정신이 혼미해져 덕을 그르치는 사람이 있을까 근심하겠습니까? 또 이렇게 되면 설사 진한 술과 연한 고기를 권하더라도, 분수를 넘거나 절도를 넘지 않을 것이니 술 빚는 것을 끊지 않더라도 곡식이 고갈될 것을 어찌 염려하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제가 일찍이 세상살이를 미루어 오늘날의 풍속을 보건대, 병은 거의 깊어 고치기가 어려운 상태이고 썩어서 어찌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시간을 아끼고 주의를 기울여, 배우기에 힘쓰고 마음을 밝히지 않고, 다만 구구한 법령으로만 바로잡고자 한다면, 명령을 해도 간사하게 응할 것이고 법을 내려도 거짓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땔나무를 안고 불을 끄고, 뜨거운 것을 끓는 물로 식히려 하는 것과 같아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양웅楊雄(전한의 학자)이 "정나라∙위나라의 악조는 설령 기(순나라 때 음악을 맡은 관인)로 하여금 연주를 시킨다고 해도 소소(순임금 때 음악을 맡은 관인)가 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정사는 연산군의 퇴폐적인 정치를 거치는 동안 진∙ 수수나라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국가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개혁을 이행하는 데 있습니다.
옛날에 무왕은 주왕의 악에 물든 매방을 간절히 타이르고 경계하면서도 오히려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까 염려했습니다. 하물며 지금 우리나라는 삥 둘러 온 사방이 매방처럼 되었으니, 주상의 간절한 마음이 무왕의 마음보다 아래에 있어서는 어찌 술의 화를 바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제 견해는 이와 같습니다. 다행히 집사선생께서 괜찮다 여기시어 제 견해를 전하께서 들을 수 있도록 하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조선 광해군 ‘섣달 그믐밤이 되면 서글퍼지는 이유에 대해 논하라’에 대한 과거 시험 답안
<책문>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워지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는 까닭은 무엇인가? 또한 소반에 산초를 담아 약주와 안주와 함께 웃어른께 올리고 꽃을 바치는 풍습과 폭죽을 터뜨려 귀신을 쫓아내는 풍습은 섣달 그믐밤에 밤샘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침향나무를 산처럼 얽어서 쌓고 거기에 불을 붙이는 화산(火山) 풍습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 섣달그믐 전날 밤에 하던 액막이 행사인 대나(大儺)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함양의 여관에서 주사위 놀이를 한 사람은 누구인가? 여관에서 쓸쓸히 깜박이는 등불을 켜놓고 잠을 못 이룬 사람은 왜 그랬는가? 왕안석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을 시로 탄식했다. 소식(蘇軾)은 도소주(屠蘇酒)를 나이순에 따라 젊은이보다 나중에 마시게 된 슬픔을 노래했다. 이것들에 대해 상세히 말해 보라.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 '이명한'의 답안>
"밝음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잠깐 사이에 세월은 흐르고 그 가운데 늙어 가는구나!” 한 것은 바로 위응물(韋應物)의 말입니다. 뜬구름 같은 인생이 어찌 이리도 쉽게 늙는단 말입니까? 하루가 지나가도 사람이 늙는데, 한 해가 지나갈 때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네 마리 말이 끌듯 빨리 지나가는 세월을 한탄하고 우산(牛山)에 지는 해를 원망한 것도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부싯돌의 불처럼 짧은 인생 집사 선생의 질문을 받고 보니, 제 마음에 서글픈 생각이 떠오릅니다. 한 해가 막 끝나는 날을 섣달 그믐날이라 하고, 그 그믐날이 막 저물어 갈 때를 그믐날 저녁이라고 합니다. 네 계절이 번갈아 갈리고 세월이 오고 가니,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역사의 기록도 믿을 수 없고,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습니다. 100년 후의 세월에는 내가 살아 있을 수 없으니 손가락을 꼽으며 지금의 이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이 새도록 자지 않는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고,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흥에 겨워서가 아닙니다. 묵은해의 남은 빛이 아쉬워서 아침까지 앉아 있는 것이고, 날이 밝아 오면 더 늙는 것이 슬퍼서 술에 취해 근심을 잊으려는 것입니다. 풍악 소리, 노랫소리 귀에 그득 울리게 하고, 패를 나누어 노름을 하면서 정신과 의식을 몰두하는 것은 억지로 즐기려는 것일 뿐입니다.
은하가 기울려고 하면 북두칠성의 자루를 보고, 촛불이 가물거리면 동창이 밝아 오는가 살펴보면서 아직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기뻐하고, 물시계가 날 밝는 것을 알릴까 두려워하는 것은, 이 밤이 새지 않기를 바라고 묵은해를 붙잡아 두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년의 세월이 어느 날인들 아깝지 않겠습니까마는, 유독 섣달 그믐날에 슬픔을 느낍니다. 그것은 하루 사이에 묵은해와 새해가 바뀌니, 사람들이 날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로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날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사실 그해가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고, 그해가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늙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늙어 가는 세월이 안타까워 물음에 따라 조목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반에 산초를 담아 약주와 안주와 함께 웃어른께 올리고 꽃을 바쳐 봄소식을 알리고, 폭죽을 터뜨리고 환성을 질러 온갖 귀신의 소굴을 뒤집는 것은 진한(秦漢)의 풍습에서 나온 것도 있고 형초(荊楚) 지방의 풍속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모두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재앙을 떨어 버리고 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굳이 오늘 다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침향나무로 산을 만들고 불꽃을 수 길이나 타오르게 하는 것은 수나라에서 전해지니 천박한 풍습이나, 이 또한 말하자면 길어집니다. 환관들의 아들을 뽑아 검은 옷을 입혀 행렬을 짓게 해서, 역귀와 잡신을 몰아내는 의례는 후한 때부터 생긴 일이니, 굳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 함양의 여관에서 해가 바뀌려고 할 때 촛불을 밝히고 주사위 놀이를 한 사람은 두보(杜甫)입니다. 여관에서 깜박이는 등을 밝히고 멀리 떨어진 고향을 그리며, 거울로 허옇게 센 머리를 들여다보며 안타까워한 사람은 바로 고적(高適)입니다.
온 세상에 재주와 이름을 떨쳤건만 어느덧 늙어 버렸고,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다가 저무는 해에 감회가 깊어진 것입니다. 젊었을 때 품었던 꿈은 아직 다 이루지 못했건만 힘겹게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늙음이 안타깝고 흐르는 세월이 안타까워 잠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왕안석의 시이고, 도소주(屠蘇酒)를 나이순에 따라 나중에 마시게 되었다는 것은 소식의 시입니다. 사물은 다하면 새로 시작되고, 사람은 옛사람이 사라지면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니, 새것에 대한 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소주를 마실 때는 반드시 어린 사람이 먼저 마시니, 나중에 마시는 사람일수록 늙은 사람입니다. 인생은 구렁텅이에 빠진 뱀과 같고, 백년 세월도 훌쩍 지나갑니다.
지난날을 돌이키면 괴로움만 남는데 살아갈 날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글로 표현하자니 모두 안타까운 호소일 뿐입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마음은 다 같고,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날은 다 똑같은 날입니다. 어릴 때는 폭죽을 터뜨리며 악귀를 쫓는 설날이 가장 좋은 명절이어서, 섣달 그믐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 의지와 기력이 떨어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세월을 묶어 둘 수도 붙잡아 둘 수도 없습니다. 날은 저물고 길은 멀건만 수레를 풀어 쉴 곳은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열에 여덟아홉은 됩니다.
몸은 성한데 운이 다한 사람도 있고, 재주는 많은데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객지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쉽게 원망이 생기고, 뜻있는 선비는 유감이 많습니다. 맑은 가을날에 떨어지는 나뭇잎도 두려운데, 섣달 그믐밤을 지새우는 감회는 당연히 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는 않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유감없는 인생을 꿈꾸며 두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늙어 버린 것을 문장으로 읊은 것은 그 감회가 오로지 늙음에 있었던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따뜻한 봄날 혼자 즐기면서 비파 소리를 유달리 좋아했다던 고적의 감회가 어찌 한 해가 저무는 것에만 있었겠습니까? 왕안석은 학문을 왜곡하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나라를 어지럽히고 수많은 백성들을 그르쳤는데, 그의 감회가 무엇이었는지 저로서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기둥에 글을 쓸 만큼 재주가 한 시대를 떨쳤고, 뜻이 천고의 세월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컸지만, 남쪽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오니 흰머리였다는 미산(眉山)의 학사(學事) 소식(蘇軾)이 느낀 감회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옛사람들이 섣달 그믐밤을 지새우며 느꼈던 감회를 헤아려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감회는 이런 것들과 다릅니다. 우임금이 짧은 시간이라도 아꼈던 것은 무슨 생각에서 그랬던 것입니까? 주공이 밤을 지새우고 날을 맞이했던 것은 무슨 생각에서 그랬던 것입니까? 저는 덕을 닦지도 못하고 학문을 통달하지도 못한 것이 늘 유감스러우니, 아마도 죽기 전까지는 하루도 유감스럽지 않은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해가 저무는 감회는 특히 유감 중에서도 유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근거로 스스로 마음에 경계합니다. “세월은 이처럼 빨리 지나가고, 나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죽을 때가 되어서도 남들에게 칭송받을 일을 하지 못함을 성인은 싫어했다. 살아서는 볼만한 것이 없고 죽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면, 초목이 시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지한 후진을 가르쳐 인도하고, 터득한 학문을 힘써 실천하며, 등불을 밝혀 밤늦도록 꼿꼿이 앉아, 마음을 한곳에 모으기를 일평생 하자. 그렇게 하면 깊이 사색하고 반복해서 학습하게 되어 장차 늙는 것도 모른 채 때가 되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니, 마음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앞에서 거론한 몇 사람의 안타까운 감정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집사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삼가 대답합니다.
'트렌데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샹치 배우 인터뷰 논란 (과거 많은 사람이 중국서 굶주려죽어) (0) | 2021.09.10 |
---|---|
속 시원~~한 수영장 청소 (0) | 2021.09.10 |
초! 고오급 벤츠 캠핑카 (0) | 2021.09.10 |
한국 최고 미남으로 공인된 청주대 학생…비주얼 어떻길래? (약 ㅎㅂ) (0) | 2021.09.10 |
통일교 기조 연설 미친 라인업 (통일교 행사에 트럼프가 왜?) (1) | 2021.09.10 |